[오현준 교육학, 통암기수능영단어] 공무원 시험 준비 시작한다.

일단 공부할 책을 정했다.

정통 오현준 교육학

토요일에 G마켓에 신청하고 오늘(화) 도착했다. 아직 강의를 구입하지 못해서 오늘은 맛보기 강의로 오리엔테이션만 봤다. 강의가 딱 내스타일인 듯하다. 맥락이 있는 강의. 1월달에 김상겸교육학을 다운받아서 몇 개 봤는데, 악몽이었다. 공무원공부란 이런건가하고 급 우울했던 기억이. 알고보니 김상겸교육학이 그랬던거였다. 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왔던 김상겸교육학 교재.

영어는 일단 단어부터 시작한다. 책은 <통암기 수능 영단어>(염종원외, 다락원).

예전에 06학번이 되기전 수능보려고  외웠던 책, 그때 책상과 침대를 오가며 겨우겨우 한번을 다 봤던 것 같다. 한번. 역시, 다시 펼쳐보니 너무나 새롭다. 어쨌든 무슨 시험이든지 영어는 통째 외우는게 최고일 듯.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다.

일단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한 책은 이렇게 두권이다.

이번 방학 때 봐야할 책이 더 있다. 지난 삼년간 우리과 바닥을 너무 독차지한 관계로 미리 예습 좀 해가려는데,

첫 책은 명심보감

중세사원강 교재로 쓰일 듯한데, 아니면 할 수 없고. 어쨌든 이책으로 공무원 한자 준비할겸, 다음 학기 예습겸해서 개학전에 한번 다 외운다.


이 책도 한번은 다 읽는다.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박종기,푸른역사)
아아, 삼년간 뭐 했는지.

일단 이렇게 정하고, 진도상황을 보면서 추가하던지 해야겠다.








by 놀자 | 2009/02/03 22:55 | 공무원공부하랴 | 트랙백 | 덧글(0)

영화 300, 이란, 이라크, 미국

300ㅣ감독 잭 스나이더ㅣ출연 제라드 버틀러, 리나 헤디ㅣ투자,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ㅣ장르 드라마, 액션ㅣ등급 18세 관람가ㅣ시간 116분

영화 [300]은 ‘300 스파르탄’을 스크린으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원작자인 프랭크 밀러는 [씬 시티]의 공동 연출에 이어, [300]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꿈틀대던 무수한 장면들이 한정된 지면에서 표현되기는 어려웠으리라. 3D화면으로 생생하게 재현될 이번 영화를 통해, 프랭크 밀러는 그간의 한을 풀게 된 셈이다. 한편 [새벽의 저주]로 데뷔한 잭 스나이더 감독은 특수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원작의 미학을 충분히 살리고자 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왕(로드리고 산토로)이 이끄는 페르시아의 수십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한다. 이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는 스타르타 정예군 300명을 이끌고 테로모필레 협곡을 지킨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레오니다스 왕에게 항복을 권유하지만, 이들의 결심은 굳건하기만 하다. 결국 물러설 줄 모르는 스파르타군과 이들을 정복하려는 페르시아군의 숙명적인 ‘테로모필레 전투’가 펼쳐진다. 레오니다스왕을 비롯한 300명의 스파르타 군은 치열한 전투를 끝마치고 장렬히 전사한다.

‘300의 군사가 수십만의 대군에 맞서 싸운다’는 뼈대만 보더라도 [300]이 어떤 영화일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러한 영화에서 으레 드러나는 서구 문명에 대한 우월감이나 영웅심리는 거슬리는 것이 사실. 예컨대 스파르타 군이 숭고하게 그려지는 부분이나, 죽음 앞에서도 용맹하게 그려지는 모습은 다소 지나쳐서 억지스럽기도 하다. 제목인 ‘300’도 스파르타 정예군만을 포함한 숫자이며, 다른 민족과 노예들을 포함하면 이를 훨씬 넘어선다. ‘300’ 군사라는 설정은, 영화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과장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만 하다.

물론 그러한 설정의 진위 여부는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워너 브러더스사의 말대로 [300]은 재미를 갖춘 ‘오락 영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군에 맞서는 스파르타 군의 갖가지 전술과 무기, 살이 찢기고 선혈이 낭자한 전투 장면들은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거기에 배우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열연도 더해져, 관객들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300]을 둘러싼 정치적인 공방은 다소 민감한 부분이다. 이란은 자신들의 조상인 페르시아군을 기형이나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것에 격분하고 있다. 실제 영화를 보면, 서방의 스파르타군은 용맹한 영웅으로 묘사되며, 페르시아의 왕은 폭도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픽션’이라는 포장을 벗겨내면, 오리엔탈리즘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근거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더군다나 이 영화가 흥행에서 이미 승승장구하고 있기에, 이란의 입장에서는 그 파급력을 경계할 만도 하다. 지난달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300]이 서구 문명을 지키려는 스파르타인의 이야기로서, 이란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선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혜미 기자(skyathena@cinetizen.com)
영화와 네티즌의 만남 "시네티즌(www.cinetizen.com)"

by 맨날배고파 | 2009/01/15 17:59 | 트랙백 | 덧글(0)

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와 나의 설교 - 박영선

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와 나의 설교

박영선

 
로이드존스 목사와의 첫 만남

내가 로이드존스를 처음 만난 것은 신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우연히 기독교 서점에 들렀다가 그의 산상설교집을 집어들고 훑어보게 되었는데, 손에서 다시 놓을 수 없을 만큼 매료당한 나머지 외상으로까지 구입하여 단숨에 읽어버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로 산상설교, 에베소서, 로마서, 목사와 설교 등의 로이드존스의 강해서들은 거의 다 빼놓지 않고 섭렵하였습니다.
그 당시 로이드존스에게서 받은 새로운 깨우침이자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 인간을 진단하는 그의 분석력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죄의 정체를 정확하게 짚어준 것이었는데 ‘죄가 성향이다’라는 언명은 나에게는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죄를 본질과 성향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고 행위와 규범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 인간 중심적으로 죄를 생각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저, 서문강 역, 에베소서 강해 2권: 영적 화해, 기독교문서선교회, 1982.
. 나아가 ‘죄가 성향’ 이라는 언명은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정말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죄가 어떻게 거룩한 모습으로 위장될 수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을 때, 예수님은 죄가 인간 본성에 깊게 뿌리박힌 성향이라는 것을 얼마나 기막히게 꿰뚫어 보신 것입니까!

신학과 설교

로이드존스에 의해서 도움을 받은 중요한 내용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오도하는 신학조류 및 신앙 행태에 내재된 허점을 날카롭게 찌르는 분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성에 근거하여 진리기준을 세우려는 자유주의나 사회복음주의의 신학 조류가 성경해석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만들었는가를 지적할 때, 신학의 영향력을 실감케 하였습니다.(로이드존스 저, 문창수 역. 산상설교집 (상), 정경사, 2000)
또한 인간이 자기 의식이나 감각을 기준으로 신앙을 점검하려는 실존주의적 시도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증상 치료의 수단으로만 인식될 수도 있음을 예시할 때, 인간의 필요를 넘어선 참된 기독교의 내용을 전한다는 것이 설교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는 마치 일반 종교처럼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초월적인 능력으로 자주 오용되곤 합니다. 사람들은 신(神) 앞에 대가를 치루고 자기 소원을 이루려는 방법으로 종교를 종종 사용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시고 통치자시며 그분으로부터만 의와 진리와 거룩에 속한 가치와 질서가 나옵니다. 우리는 그에게 의존하며 그의 은혜와 인도하심 없이는 어떤 가치나 질서나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의 필요에 의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보다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과 말씀하심을 필연적으로 앞세워야만 합니다. 이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너무도 당연한 관계질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로이드존스는 현대 기독교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개혁주의 신학의 두 축을 근간으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견지해내는 사명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일차적 책임으로 삼는 설교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포함하여 온 우주만물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시며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왜 하나님만이 답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완성을 요구하시며 이러한 완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채우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또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원리

설교가 기독교의 핵심 내용을 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설교자들이 종종 성도들을 감동시키려는 의욕이 앞서는 것은 위험합니다. 설교란 스타일이나 테크닉이 아닐 뿐더러 감동이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하시며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모든 것을 모두 전하는 데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에 부차적으로 따를 수 있는 감동도 단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해답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하심에 순종해야 하는 인간의 처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요구가 참다운 은혜이며 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본문을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둔 강해 설교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강해 설교를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단지 제목 설교보다 더 나은 설교형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교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또는 성도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모두는 먼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강해 설교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만약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부분적이거나 편중되어 있으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보게 하는 안목, 한 마디로 신학을 요구합니다. 신학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 자기가 필요한 하나님만을 보게 되는 한계를 넘어서서 성경에서 설명한 하나님을 전체로 다 보게 해 줍니다. 따라서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떤 신앙적인 노선이나 주장을 갖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전체를 조감하며 종합하는 것으로서, 그리하여 성경을 보는 안목에 균형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신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이 그 전문성과 경직됨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만,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신학의 필요성을 숙지하지 못하고 부정적 견해를 갖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설교의 해석학적 원리

로이드존스 목사의 에베소서 강해설교집 5권(로이드존스 저, 지상우 역, 에베소서 강해집 5권: 영적 연합,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의 첫 장에는 신약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라는 ‘그러므로’란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를 통하여 그는 앞의 서술과 뒤따라 나오는 명령을 연결하여 성경을 볼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경의 말씀들이 일종의 격언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훈적인 문구를 찾는 데 집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결과 성경의 문맥 속에서 전체의 뜻을 추적하여 말씀 속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해하는 것을 놓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강조를 통하여 성경을 전체 문맥 속에서 살피는 안목과 이러한 안목에 기초하여 사고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력의 결실로 나타난 것의 한 예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대한 저의 해석을 들 수 있습니다 박영선 저, 마태복음 강해 2권, 세움출판사, 2002.
. 우리는 보통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문맥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러할 때 이 명령은 어떤 영웅적인 일을 해야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 의 결론과의 연결 속에서 33절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사건으로서가 아닌,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신앙적인 결단이요, 책임이요, 인내요, 충성인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맺음말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의 사역 기간동안 내내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 앞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고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그 권위와 심판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 잘못과 허구를 지적하고 경고하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어떤 시대와 사회에 한정된 특별한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적은 언제나 인간 자신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를 대적하여 그의 자리를 넘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싸움이 그 형태만 달리할 뿐 우리 주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성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형태로, 잘못된 신비주의나 자연주의(理神論)가 성령운동이나 성경공부 등의 신앙적 명분을 내걸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의 업적과 가치는 전쟁영웅식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의 해결자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의 근거와 본질을 분명히 지켜낸 그의 신학 원칙과 설교 자세라는 차원에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바울을 본받는 것으로 표현될 때, 이는 결코 바울이라는 한 개인을 영웅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로 드러난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원칙에 대한 이해와 표현 그리고 적용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로이드존스의 업적도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나 변함 없이 지켜져야 할 신앙의 정당한 이해와 본질을 지켜내었다는 점에서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박영선 / 남포교회 담임목사

by 맨날배고파 | 2006/12/09 10:46 | rebirth | 트랙백 | 덧글(0)

세금폭탄

세금폭탄’은 생각하지 마

[한겨레] 조지 레이코프. 그는 인지언어학의 창시자로서 20세기 언어학의 대가인 노엄 촘스키에 버금가는 저명한 학자다. 우리에게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이 책에서 왜 서민들이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 원인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틀, 즉 프레임에서 찾는다.
미국 공화당은 사람들의 가치체계에 익숙한 프레임을 만들어 논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는 설명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감세정책을 ‘세금구제’란 프레임으로 바꿔치기한 경우를 든다. ‘세금’과 ‘구제’를 결합해 세금은 고통, 이를 없애는 사람은 영웅, 방해하는 자는 악당이라는 은유를 창출한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는 단연 ‘집값 폭등’이다. 현 정권에 한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지지자들조차 등돌리게 만들고 있다는 병리적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 정책의 잘못을 꼬집고 정부에 대한 불신을 성토한다. 틀린 말은 아니나 레이코프가 얘기한 프레임 탓도 적지 않다.

투기세력은 ‘세금’과 ‘폭탄’을 접목해 ‘세금폭탄’이란 프레임을 만들었고 보수언론은 이를 유통시켰다. 이들은 이슈를 선점했고 덕분에 기득권을 부지한 것이다.

대부분의 부동산 시장 전문가들은 올해의 부동산 가격이 안정적일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
8·31 대책과 올 초의 3·30 대책에다 두차례의 금리 인상이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측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가 ‘세금폭탄’으로 둔갑하면서 세금이 사유권 침해로 분탕질되었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는 지대소득 계층을 사회의 기생충 같은 존재로 간주했다. 그리고 지대소득의 누적적 증대를 경제성장의 근본적 걸림돌로 보았다. 그런데도 보유세 강화, 양도세중과, 개발이익 환수가 곧 세금폭탄이라는 비합리적 프레임은 국민적 정서로 자리 잡았다.

‘세금폭탄’ 프레임의 성공적 안착에 고무된 결과일까. 〈조선일보〉는 세금폭탄의 피해자를 소수의 부동산 졸부가 아닌 온 국민으로 규정하는 무모함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부동산이 미쳤다’ 기획시리즈 2탄의 제목은 ‘무차별규제·세금폭탄…온 국민이 고통’(11월14일)이었다. 강화된
종합부동산세납부가 임박하자 보수언론은 일제히 ‘폭탄론’을 재탕하며(‘내달 종부세 폭탄 터진다’ 〈중앙〉 11월18일, ‘종부세 대란 오나’ 〈동아〉 11월27일)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한겨레〉는 종부세가 집값 안정으로 이어질지에 주목하고(‘강화된 종부세 집값 영향 관심’ 11월27일) 납세 거부 움직임을 비판했다(‘종부세 폭탄 못내겠다…’ 11월28일). ‘세금폭탄’ 프레임의 허상을 지적한 기사였으나 제목과 내용에서 ‘세금폭탄’이란 용어를 차용하는 우를 범했다.

이는 투기세력이 교묘하게 고안한 프레임을 부질없이 확대재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레이코프는 상대방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이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는 격이라고 했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폭탄’이니 ‘폭풍’ 식의 자극적 언사는 삼가야 한다.

스콧 니어링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생각의 틀이다. 프레임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가 대한민국 집값 안정의 변수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재영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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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날배고파 | 2006/11/29 23:16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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